이제마의 여인 시리즈2, 이제마의 첫째부인 경주김씨 이야기
작성일 2016-03-31 조회수 729







이번편은 태양인 이제마의 여인 시리즈 두번째로, '이제마의 첫번째 부인인 소음인 경주김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마의 부인들


이제마는 부인이 3명이 있었고 첫째 부인이 경주김씨, 후실인 둘째 부인이 김씨, 후실인 셋째 부인 또한 김씨입니다.

첫째 부인에게서 아들 용해를 두었고, 둘째 부인에게서 아들 용수를 두었고, 셋째 부인에게서는 딸을 하나 두었다고 합니다.

이제마의 자녀들에 대한 얘기는 또 다른 포스트로 미루고 오늘은 첫째부인  경주김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함경도의 경주김씨 


이제마의 어머니(생모)와 이제마의 첫째 부인이 모두 경주김씨입니다. 이제마의 둘째, 셋째 부인도 김씨인데 경주김씨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마의 아버지 이반오 진사의 4명의 부인 중 전주김씨가 2명, 정선전씨가 1명, 이제마의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므로 다양한 김씨 들이 일대에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으로 부터 분파되어 셋째아들 영분공 '명종'과 넷째 아들 대안군 '은설'을 1세조로 양분됩니다.

특히 이제마가 살던 함경도 지방에는 대안군의 후손들이 많았다 합니다. 

 

그 중에서도 병판공 덕재의 후손들이 가장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제마의 생모와 첫째부인도 병판공파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유추된다고 합니다.

물론 함경도에 살았던 모든 김씨가 병판공파는 아니기에 확증이 된 것은 아닙니다.


첫번째 부인 경주김씨

 

이제마의 첫번째 부인 경주김씨는 김규형의 딸로 헌종4년(1838년) 강원도 양구 해안에서 출생하여 21세에 이제마와 혼인하고 이제마와의 사이에서 아들 용해가 출생한 기미년(1859년 11월)에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망연도를 우리가 흔히 아는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기미년(1919년)으로 보고 있는 책도 있으나(이창일 역주 동무유고) 1859년일 개연성이 훨씬 높습니다.

이제마가 1900년에 사망하고, 1922년에 아들 이용해가 사망하여 모두 천서면 운동 율동에 묻혀 있는데 그 사이인 1919년 부인이 사망했다면 같은 곳에 묻히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묘소가 정평군 주이면 호동리 박장동에 묻혔다는 것을 보면 1919년이 아니라 1859년의 기미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경주김씨의 아버지 김규형


김규형은 이제마의 장인이 되는데 본은 경주, 자는 문옥으로 헌종 3년 정유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갑자년에 고산도 찰방이 되고,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습니다. 과거 후에 집을 양구 해안으로 이사 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관련 문서를 볼 때 김규형은 순조 5년(1805년)에 출생하여 함경도 홍원에 거주하다가 33세인 헌종 3년(1837년) 과거에 합격한 이후 강원도 양구 해안으로 이사하여 살다 이듬해 1838년 이제마의 첫째 부인이 태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규형은 60세인 고종 1년(1864년) 3월 정4품 사헌부 장령이라는 벼슬에 임명되고 6월에 고산채방에 재수되고 그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보통 이제마 관련 서적에 '장령' 김규형의 딸인 경주김씨와 결혼하였다고 하는데 이제마와 경주김씨가 결혼할 당시(철종 9년 1858년)에는 장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마의 결혼하다


이제마의 이복동생인 이섭증이 이제마보다 앞서 18세 나이에 청주한씨와 결혼하여 아들 이시규를 낳고, 둘째 아버지의 장남인 이섭관 마저 아들 이용규를 낳자 이제마도 집안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858년 이제마의 나이 22세 되던 해 김규형은 서출이긴 하지만 함흥 일대에서 덕망이 높은 이충원의 가문 이제마에게 딸을 출가시키게 됩니다.


경주김씨는 소음인


소음인인 경주김씨는 방랑기가 많아 안정이 안 되던 이제마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가정을 선물합니다. 결혼 후 곧 임신을 하게 되고 1859년 5월 2일 첫째 아들 용해가 태어납니다.


이제마의 부인은 소음인으로 성격이 유순하고 다정다감하고 할 말을 잘 털어 놓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두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마는 태어난 아이가 유약하기보다는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감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이름을 '용'이라고 지었으며 이후 '이용해'로 개명하게 됩니다.




용해의 자는 웅규이며 호는 죽심입니다.


경주김씨는 임신 중인 1859년 1월에 이제마의 첫번째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상례를 치르느라 잘 쉬지를 못했고, 또한 남편이 서얼 출신이라 아마 양반댁에 더욱 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출산 후 무더운 여름을 맞이하고 산후 조리기간의 무더위가 허약한 소음인에게는 많이 힘들었을 것인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그해 10월부터 전국을 휩쓸어 40만 명이 사망하였다는 악질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같은 해 11월 21일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제마의 신혼생활


이제마는 부인을 얻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신혼의 달콤하고 행복한 모습을 여러 시에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중 한편입니다.


 

따스한 봄기운을 머금은 산은 우뚝 서 있고

꽃 떨어진 천만 봉우리에 초목도 푸르러라.

마음 편히 흥을 타고 유유히 가노니

석양에 몸을 맡기고 취해도 취하질 않네.



그러나 부인과 사별한 젊은 이제마는 깊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23세 가산을 정리하고 태어난 아들을 셋째 어머니 전씨에 맡기고 홀연히 집을 나와 세상을 유람합니다.

그러던 중 우리나라 성리학의 6대가 중 하나로 알려진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유학을 배우게도 됩니다.


이상 이제마의 첫번째 부인인 경주김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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